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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백] 野談 야담의 4 챕터에서 이어집니다.
PLUS + 1.
지독했던 더위가 가고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 공기에서도 열기보다는 서늘함이 맡아졌다. 퇴근 후 둘이 나란히 나가도 구설수 한 번 오르지 않는 까닭은 둘이 사수이기도 하고, 둘 다 같은 성별인 덕이었다. 금요일 저녁에 칼같이 퇴근하고 같이 사우나에 들른 후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자질구레한 안주를 샀다. 그렇게 짧은 데이트를 끝내고는 익숙하게 해준의 집으로 향했다.
이상한 일을 잔뜩 겪은 여름의 끝 무렵, 해준과 백기의 관계는 좀 더 다른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단순한 직장 선후배에서 약간은 애매한 사이로, 그리고는 성큼 다가온 해준에게 이끌려 연인이 되었다. 백기는 해준이 일만 잘하는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을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연애는 그 중에 발군이었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으면 오는 스트레스를 각오했건만, 그는 연인에게 두근거림과 편안함을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러다보니 어어 하는 순간 휩쓸려 그의 곁이 익숙해져버렸다. 이게 해준의 계산이라면 정말이지 치밀하기 짝이 없었다.
침대에 반쯤 누워 프로젝터를 켰다. 해준이라면 예술 영화를 틀 것 같았지만, 의외로 액션물을 자주 선택 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영화들을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이래서야 영화를 보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딱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왠일로 해준이 꽤 오래전에 나온 로맨스물을 틀었다.
“이거, 그거죠? 과거와 현재의 남녀가 시간을 넘어서 알게 되는거.”
해준은 백기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때 굉장히 흥행했던 이야기였다. 지금은 장르물에서 자주 써먹는 소재지만 저때만해도 신선했었다. 지나가다 텔레비전에서 나올때 조금씩 봤던 영화라 시작부터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백기는 무릎을 끌어안고 해준의 어깨에 기댄채 영화를 감상했다. 해준의 손이 백기의 뺨과 머리카락을 지분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에 집중했다. 해준은 불만인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대리님.”
자꾸 감상을 방해하자 백기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해준은 백기의 경고에도 살짝 웃으며 손에 깍지를 껴왔다. 백기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응석부리듯 해준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그리고는 조금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혹시 말이예요.”
“네.”
“……이상하다고 생각되어도,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네. 백기씨는 자주 이상하니 괜찮습니다.”
백기는 입술을 비죽였다. 이런저런요런 일들이 있었던 데다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해준의 말에 딱히 반박을 할 수 없다는게 더 짜증났다. 머리를 떼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해준이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품으로 안았다.
“농담이예요. 부탁이 뭡니까?”
백기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달래듯 어르는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쉬고 눈을 흘겼다. 하지만 부탁하는 사람은 자신인지라 길게 투덜거리지는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많이 이상하면요. 그러니까 약속을 까맣게 잊었다거나, 출근했을 때랑 퇴근할 때랑 다르거나 하면. 절 다시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사무실로 돌려보내주세요.”
“그러죠.”
어딜봐도 기묘한 부탁이었다. 백기는 아무리 해준이라도 이런 부탁을 하면 의아하게 여길텐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즉시 해주겠다고 답했다.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자 해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그리 걱정하는 얼굴입니까.”
“……단숨에 허락해주니 고맙기는 한데, 대리님도 저처럼 괴상한 일에 익숙해져서 휘말려들까봐 걱정되네요.”
“내가 약속도 지킬거고, 위험하면 지켜줄게요. 백기씨 겁이 많아서 큰일이네요.”
앞의 말은 든든했지만, 뒤의 문장에는 그가 백기를 놀릴때 하는 어투가 묻어났다. 울컥했지만 발끈한 모습을 보여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겁이 많은 건 아니었다구요.”
“그럼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까?”
이번엔 기어코 해준의 품에서 빠져나온 백기는 베게를 끌어안아 거리를 뒀다. 결국 이렇게 이번 영화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흘러가고 있었다.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두고 백기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어릴적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때는 겁이 없고 호기심이 많았어요. 궁금한건 꼭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요.”
“음. 그랬군요.”
“어느날 사촌 누나가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거 있잖아요. 자정에 흰 옷에 머리풀고서 칼을 물고 거울을 보면 미래의 배우자가 보인다는 이야기. 아세요?”
“아아, 네.”
흔해서 어느 동네에나 있는 이야기였다. 해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재촉했다. 잘 듣는 청자를 두고 있으니 백기는 조금 신이났다.
“처음 듣고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래도 궁금한거예요. 그 날 친척들이 가고 나서 부모님도 피곤하다고 일찍 주무셨거든요. 때는 기회였죠. 궁금해서 잠도 안오는데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든거예요.”
“흰 옷이 있었어요?”
“아빠 샤워 가운을 몰래 꺼냈죠. 잘 안넣어놔서 다음날 혼났는데....... 여튼, 그래서 엄마 몰래 부엌에서 과도를 꺼내서 십분 전에 화장실로 갔어요. 그리고 기다렸죠. 왜 그렇게 시간이 안가던지.”
백기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지금도 마치 영화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손에 땀이 났다. 잔뜩 긴장해서는 당장이라도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촌 누나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지만 그런게 어디있냐며 괜히 자존심을 세운게 문제였다. 그냥 적당히 말로 둘러대면 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요령이 없어서 몸이 고생했다.
겨우 투덜거리며 이를 악물고 버티는데 드디어 거실의 시계에서 댕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 12시. 자정이었다. 백기는 한껏 용기를 끌어올려 과도를 입에 물고 거울을 바라봤다.
조금은 기대했었다. 당연히 보이지 않겠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보인다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0.5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거울에 비친 것은 많은 기대를 배신한 것이었다.
찰나였지만 백기는 분명히 인지했다. 거울에 드러난 상은 어두운 색의 해골이었다.
“아마 헛것이었겠죠.”
“자신해요?”
“음…. 아마도?”
백기는 쓰게 웃으며 소름이 돋은 팔뚝을 매만졌다. 정말 어릴때 있던 일인데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해준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평소같으면 위로할 겸 다시 끌어안았을 텐데 백기는 다른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 압니까? 그런 경우는 배우자가 될 사람이 죽거나, 혹은 만나기 전에 백기씨가 죽는단 뜻이예요.”
“……뭐예요. 무섭게.”
백기는 얼굴을 찌푸리고 품에 안고 있던 베게로 해준의 어깨를 쳤다. 그러나 해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백기는 자신보고 겁쟁이라고 놀린 해준의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뭘 그런 미신을 믿어요."
“좋잖아요.”
“뭐가요. 하나도 안 좋아. 무섭고.”
백기는 불퉁한 얼굴로 해준을 바라봤다. 해준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백기씨 상대가 죽어서 우리가 만났잖아요.”
해골을 봤던 기억보다 그의 말에 더 소름이 돋았다.
“농담입니다. 역시 겁이 많네요.”
백기는 해준의 웃음기 섞인 말에 결국 욱해버렸다. 베게로 툭 치는 정도가 아니라 몇번이고 퍽퍽 치며 울분을 토했다.
“대리님! 나 놀리면 재밌습니까!”
“네.”
“이익!”
분했지만 결국 해준에게 베게는 뺐겼고 허리도 홀랑 뺐겼다. 백기는 해준과 함께 침대의 스프링을 성인 남성 두명의 무게로 한참이나 시험하고 난 후에야 겨우 꿈나라로 떠날 수 있었다.
그가 먼저 잠들고 자정이 되자 해준은 머리맡에 둔 거울을 들고는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백기가 살아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거울에 보이는 해준이 얼굴을 찌푸리고 먼저 사라졌다. 다시 본 거울에는 그저 해준의 모습만이 비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