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을 보내다 보면 금세 세상에 매몰되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진다.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왔다 자부해도 그런 자신감은 쓸모없었다. 문득 제자리에서 쳇바퀴만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한낱 먼지와 자신이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었다.
자존감은 부족하지만 자신감은 넘치는 백기가 스스로를 폄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입사 후 딱 한 달이면 족했다.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대학에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정석대로 밟고 굴지의 대기업인 원인터에 입사가 확정된 순간까지는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았다.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스스로가 제법 대단한 인간이라고 여겼었다. 학창시절에는 성적이 인간의 품격을 올려준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웠다. 그때는 자신과 타인 모두 한낱 숫자 몇 개로 사람을 판단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아등바등해서 들어온 회사는 백기에게 단 하나의 성취감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신입이 알면 뭘 알겠는가. 무뚝뚝한 사수를 따라 졸졸 쫓아다니거나 삐약거리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사실 아직 업무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신입 중 에이스라 불리던 안영이는 업무 파악도 빠르다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보통 사람과는 다른 DNA로 이뤄진 모양이었다.
평범의 편차치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에겐 새로 배우는 모든 일은 녹록지 않기 마련이었다. 백기는 유독 환경이 크게 바뀔 때마다 힘들어했다. 하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고, 한탄을 들어줄 사람조차 없었다. 학교가 그나마 보호막이 있는 쳇바퀴였다면, 지금은 케이지 밖에 노출된 야생용 쳇바퀴였다. 바퀴에서 떨어지면 예전처럼 보호받을 수 없었다.
가끔 동기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일은 그나마 한숨 돌리는 시간이 되었다. 갑갑하기는 다들 마찬가지라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좁은 취업 문을 지나왔지만 정직원도 쉽게 찍혀나가는 회사에서 동병상련을 느끼기에는 동기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늘 점심은 영이와 석율이 함께했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오후를 위해 위에 샷이 추가된 카페인을 쏟아 붓고 나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혈중 카페인 농도는 늘 일정하게 유지해줄 필요가 있었다.
“요즘 뭐해요? 그쪽 부서 뭔가 시끌시끌하던데.”
석율의 질문에 영이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바라보다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업무 내용은 부서별로 공유하지 않지만, 석율은 온갖 부서의 소문을 주워들었고 분위기 파악은 누구보다 빨랐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자신의 사수에 관해서는 판단을 잘못해 현재 진행형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다른 일에는 더 철저해졌다. 백기는 무언가 새로운 소식이 있을까 싶어 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커피 안에 넣은 시럽을 섞던 백기의 손길이 조금 느려지다 이내 멈췄다.
“외부 업체에 광고를 맡겼는데, 위에서 원하는 모델이 있어서 꼭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거든요. 근데 쉽게 계약하지 않아서요. 덕분에 우리도 고생하게 생겼어요. 무조건 해야 한다니까. 적당히 유명한 연예인 하면 좋을 텐데.”
영이는 검지를 들어 천장을 가리키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계약을 무를 수 없게 일이 꼬여 발로 뛰게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빈 종이컵이 반대쪽 손에서 우그러졌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석율이 물었다.
“누군데요?”
“장그래요. 아시잖아요, 김이사님이 바둑 엄청 좋아하시는 거.”
“아, 그 바둑 기사 말이죠? 우리 나이에 그 정도 실력자 없죠. 바둑을 몰라도 그 사람은 알더라. 1, 2년 전부터 다들 장그래 이야기만 하던데요?”
“의외네. 석율씨 바둑 잘 알아요?”
“의외라니, 뭡니까. 나름 박학다식한데. 집안 어른들이 좋아하셔서. 대충? 바둑을 잘 두지는 못해요. 보는 건 어느 정도 알지만요.”
백기는 둘의 대화에 놀라서 커피잔을 가지고 놀던 손을 멈췄다. 익숙한 이름 석 자였다. 한동안 아예 바둑계에는 귀를 닫고 살았더니,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애써 외면하던 그리움이 밀려와 감정을 숨기느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백기씨 왜 그래요?”
그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는지 영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디 몸이라도 상했나 싶어 유심히 바라보는 기색에 백기는 빠져나갔던 넋을 애써 잡아당겼다. 급히 손사래를 치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어요. 여기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라서요.”
“정말요?”
영이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백기는 그 눈빛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지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다. 영이는 그의 손을 꼭 잡고 ‘YES’라고 답할 때까지 놓지 않겠다는 듯 틀어쥐었다. 자신보다 작은 손인데 손아귀 힘이 상당했다. 절박한 인간은 상상 이상의 힘을 내곤 하는 법이었다.
“아니, 영이씨 어디서 외간남자의 손을 그렇게 잡아요?”
“석율씨 헛소리는 듣지 말고. 백기씨 우리 팀 좀 도와줘요. 철강팀에는 협조 요청할게요.”
“네? 저기, 저랑 연락 안 한 지도 오래됐어요. 그냥 같은 반 친구였을 뿐이에요.”
한 발 빼려는 백기의 노력은 영이의 적극적인 행동에 무참히 쓰러졌다.
“괜찮아요! 다음 대회 준비에 집중한다고 지금은 만나는 일도 곤란하다는 답변을 받았거든요.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게라도 해줘요! 시도라도 해봐야죠!”
영이의 박력은 이미 백기가 어찌해볼 단계를 넘어섰다. 석율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이 두 사람이 덤비기에는 영이는 너무 센 보스급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빨리 포기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빨대를 입에 물고 눈을 굴리는 모양새가 한껏 재미난 일을 발견한 모습이었다. 백기는 석율의 지원 사격을 포기한 채,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강대리님이 허락하시면요.”
“물론이죠!”
강대리는 일에는 철저한 사람이었고, 부서 외의 업무로 백기를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철강팀 업무에 매진해도 모자를 판에 웬 외부 업무란 말인가? 껍질도 못 뗀 병아리를 엄마 없는 곳에 보낼 만큼 매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열심히 구를 테니 보내지 말아 주세요, 사수님!
점심시간이 끝나고 약 한 시간 후, 옆자리의 해준이 백기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당연히 일을 시키려나 싶어 눈을 돌리자 무심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마케팅팀 일 잠시 도와주고 오세요. 과장님이 부탁하시네요.”
해준을 향한 믿음은 그날 오후 산산이 부서졌다. 병아리건 뭐건 다른 데서도 데굴데굴 구르라는 명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믿는 실수를 범한 백기의 패배였다.
◈◈◈
그래는 늘 눈에 띄었다. 고만고만한 소년들 사이에서 확연히 그의 주변만 공기가 달랐다. 보통 그런 애들은 극과 극에 위치했다. 집단에서 유리되거나, 혹은 동경의 대상이 되거나. 장그래는 누가 봐도 후자였다. 차분하게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운동도 좋아했고 언뜻 보기에는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적어도 교실 안에서 그가 홀로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자리를 바꾸면서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면 백기와 접점은 거의 없다시피 했을 터였다. 자신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라 여겼다. 계기가 없었다면 장그래와는 말을 나눌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저 조금은 동경하고 조금은 질투한 채, 나중에는 졸업 앨범을 볼 때야 ‘이런 애가 있었지’하고 떠올릴 그럴 사이였다.
백기는 전형적인 우등생 타입이었다. 공부에 매진하고 내신도 잘 받을 겸 대학 입시를 위해 학급 반장을 맡는 어느 학교에나 몇 명은 있을 법한 아이였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아 학교가 세상 전부였던 백기는 성적이 자신의 존재 가치였다. 점수 몇 개가 자신을 증명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배우고 익힌 판단 기준이 고작 그것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 시절에는 반에서 애들이 장백기라는 이름보다 반장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익숙한 나날이었다.
그래는 달랐다. 바둑 기사를 목표로 해서 1학년들 대부분이 참여하는 야간 자율학습도 빠지기 일쑤였다. 처음엔 사정을 모른 채 땡땡이치는 줄 알고 무시했는데, 중간고사를 보고 그를 다시 봤다. 쉬는 시간도 쪼개가며 죽어라 공부에 매달리는 백기와 고작 2점 차이였다. 단 한 문제로 그래는 반에서 2등을 했다. 백기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1등을 해놓고 짜증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주변을 의식하는 무렵이었으니 주변에 좋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다음 기말고사에는 실수를 최대한 줄이고 더 열심히 해서 점수를 올리리라 결심했다.
백기는 눈이 더 나빠진 일을 핑계로 자리를 앞으로 당겼다. 뒤에 있으면 집중하기도 힘드니 어머니와 머리를 굴려 만든 이유였다. 안경을 써도 눈이 쉽게 피로해지니 스트레스를 덜 받고 싶다고 어필하자 선생님은 쉽게 자리바꿈을 허락했다. 백기는 키가 제법 컸던 터라 창가의 두 번째, 그래의 옆자리를 내어줬다. 원래 그래 옆에 앉던 아이는 뒷자리로 가게 됐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반장 그럼 책상 채로 바꾸자. 그게 편하잖아?”
“어. 그래.”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백기는 자신을 반장으로 칭하는 일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선생님부터 급우까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예외인 중학교부터 같은 학교로 진학한 친한 친구들은 뿔뿔이 다른 반으로 흩어졌다.
“잘 부탁해, 백기야.”
“……응. 잘 부탁해.”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이름이 불려 당황한 나머지 대답이 늦었다. 몇 번이고 봤었지만 그의 환한 미소가 자신을 향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눈을 깜빡이던 백기는 그래의 도움 덕에 책상을 쉽게 옮겼다.
질투한 자신이 부끄럽게도 그는 맑고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그래의 손에 이끌려 백기는 급속히 그와 가까워졌다. 한 번도 이렇게 엮이리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