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한석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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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사건을 목격한 두 명의 사람이 기억을 반추할 때, 서로 기억하는 것이 같을까? 아니다. 그 누구도 정확히 같은 위치와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온갖 감각을 이용한 정보를 저장하고 다시 불러낼 때 그것이 일치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한석율은 가끔 이상한 일을 겪더라도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일상’이라는 것은 개인에게 쌓여 반복되는 하루 일과를 칭하는 말이었다. 남들의 비일상이 석율의 일상이라고 해서 큰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석율에게는 가끔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오늘처럼 성대리의 왼 발목부터 무릎을 지나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은 뱀이 확실히 혀를 날름거리거나 하는 것 말이다. 제법 굵어서 저대로 성대리 목을 졸라버리면 한 번에 하늘로 보내줄 것 같았지만 저건 그냥 석율의 눈에만 보이는 신기루였다. 아마 오늘 성대리는 열심히 작업하던 사람에게 차인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는 잔뜩 곤두서서 완전 소시오패스끼를 남발하니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석율은 일을 대충 끝내놓고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사람은 살다가 늘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흔들리는 감정의 조각을 석율은 엿보곤 했다. 아니, 보기 싫어도 보였다. 자세히 알 수 있다면 도움이라도 되련만 두루뭉술하게 암시만 줄 뿐이었다. 그 사람에게 동물이 붙어 있거나, 신체에 동물의 특징이 나타났다. 뱀이 정말 냉정하고 또라이 같은지는 모르지만, 석율이 생각하는 뱀은 그랬다. 처음 성대리의 어깨에 뱀이 보였을 때 석율은 소름이 돋지만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보이는 사람들이 고난을 겪는 이유를 석율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자기가 생각하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맞는 동물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눈치 빠른 석율은 제게 닥칠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위험한 사태를 피해 선택한 피신처는 15층이었다. 동기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보기 위해 16층의 휴게실에 오지 않는다. 석율은 서운하지도 않았고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누군가 16층에 나타난다면 불안해질 터였다. 사람은 일탈을 꿈꾸지만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순간 심하게 흔들린다. 석율은 제가 비틀거리는 것은 수비 범위에 들어가지만 남의 어그러짐은 꽤나 곤란하게 여겼다.
그러니 평소처럼 능구렁이를 몸에 칭칭 감은 사수를 피해 살살 15층으로 향하는 것은 석율 나름의 일상이었다. 다른 팀은 적당히 굴러가고 있는지, 그나마 하루 한 번씩은 얼굴을 보고 안색을 체크해야 마음이 놓이는 동기들은 숨통이 트였는지 봐야 직성이 풀렸다.
엘리베이터나 혹은 비상구의 문을 열면 둥실 몸이 뜨는 기분이 들었다. 16층과 15층은 한석율에게는 다른 영역이었다. 어찌 보면 그렇게 구분하면서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는 지도 몰랐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서 이상한 것이 보여도 놀라지 말아야 했다. 차라리 늘 보인다면 괜찮을 텐데, 온오프가 멋대로 이뤄지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오우, 오늘은 다들 무사한가?’
영업 3팀의 그래부터 훑는 석율의 눈은 제법 만족스러운 점수를 매겼다. 일이 즐겁지만 몸은 피곤해 보이는 그래에게는 홍삼 스틱 하나를 처방했다. 역시 사포닌의 각성 성분은 웬만한 카페인 보다 나을 때가 있다.
“그래그래, 잘한다. 쭉 들이켜 쭉!”
“한가합니까. 여기까지 와서 이러게.”
굳이 한 마디를 빼놓지 않지만 석율은 미소로 방어했다. 어차피 장그래도 투덜거리며 잔소리해봤자 석율에게 이빨도 안 들어간다는 사실을 안다. 알면서도 성격 탓에 결국 한 소리 하고 마는 것이었다. 눈인사로 고맙다는 티를 내는 그래를 내버려두고 슬슬 자원팀으로 향했다.
한동안 많이 힘들었는지 석율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영이는 자리에 없었다. 영이는 부쩍 힘이 드는지 꼬리가 살랑였다. 그것이 동물원에서나 보던 사자꼬리라는데 석율은 오늘 점심을 걸 수 있었다. 한창 심기가 불편한지 휘두르던 꼬리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녀가 다른 부서로 심부름을 갔다는 소리에 석율은 붙임성 있게 인사를 하고는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저쪽은 가끔 보기 싫은 것들을 보게 만들어서 영이가 없다면 굳이 들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나 영이는 그나마 석율을 반겨주는 편이었지만, 장백기는 한참 사수에게 절여지고 나더니만 일할 때는 말대꾸도 해주기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석율이 백기를 은근히 놀려먹어서 그렇다는 사실은 완벽히 무시하기로 했다. 다 애정 아닌가? 이해하지 못하는 백기가 아직 어린 것이 분명했다.
휴게실에서 커피나 땡길때 보거나 점심 때 만나는 쪽이 편한데, 오늘은 어째 점심도 철강팀에서 해결 했는지 얼굴 보기 힘들었다. 열심히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미동도 하지 않아서 석율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고 16층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파티션 경계 위로 하얀 토끼 귀가 뿅 하고 솟아올랐다. 석율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제자리에 발을 멈췄다. 분명히 장백기의 머리에서 튀어나왔다. 하얗고 보송보송해 보이는 귀는 긴장했는지 바짝 서서 주변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토끼, 토끼라니! 크크크큭!’
백기에게 너무 잘 어울려서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석율은 되도록 심각하려 애썼다. 저게 보인다는 것은 백기에게 딱히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이제 석율은 토끼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고민해야만 했다. 일단은 자리에 돌아가서,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백기를 낚아볼 생각이었다. 그 속을 탈탈 털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관심을 주기에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주는 것도 괜찮았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 살금살금 15층을 빠져나가는 석율의 등을 백기가 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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