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잘 다니던 백기가 사표를 제출하게 된 것은 3년차였다. 남들이 말하는 3년차 증후군 탓인지,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한 것인지 말은 많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까닭을 밝히지 않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백기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릴 적부터 틈틈이 할아버지에게 배우던 일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참이었다. 늘 그를 지지해주던 할아버지가 나중에 가게를 물려주시겠다고 공언하시고 나서야 가족들은 백기의 고집에 져주었다.
백기의 꿈은 테일러였다. 늦깎이로 유학을 떠나면서 그는 아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熱望
할아버지의 가게는 고풍스럽고 또 유명한 곳이었다. 손자라고 해서 쉽게 물려받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정장을 맞추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의 가게의 VIP는 모 금융회사의 임원들이었다. 정보가 새어나가면 곤란한 그들은 보통 한 회사의 중역들은 같은 테일러샵을 이용했다. 할아버지의 명성은 그들이 만족하기에 충분했다.
백기는 처음엔 보조로 손님들의 옷 치수를 재고, 천을 골랐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색과 재질이 달랐으며 몸의 결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선은 확연히 다르게 그려졌다. 백기는 그 모든 것이 즐거웠다. 매일 같은 일을 하며 아등바등 가지려 애썼던 동기는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쉽게 마음에서 솟아났다. 어떻게 하면 더 어울릴지, 상상하고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큰 기쁨이었다.
백기가 일이 익숙해지자 점점 그가 전담하는 고객들이 생겼다. 젊은 사람들은 할아버지보다 백기를 선호하는 경우도 있었다. 30대 초반에 해외 유학파, 실력도 좋고 센스도 좋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백기는 쑥스럽기도 했지만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미소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그 손님들 중 한 명은 유난히 백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계절이 바뀔 때나, 옷을 수선하기 위해서나, 혹은 드레스 셔츠 등 아이템을 업데이트 할 때마다 찾아오는 그는 자주 오는 고객이었다. 젊고 유능한 엘리트를 말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가 백기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별 것 아닌 이유였다. 그는 곁을 허용하지 않았다.
처음 줄자를 잡고 가위를 들었을 때, 할아버지는 백기에게 옷 만드는 기술에 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처음 당부한 것은 입이 무거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게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옷을 잘 만들어도 개인 샵을 운영하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다. 백기는 할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그 덕분인지 가게에 오는 어떤 사람도 그 앞에서 속을 내보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도 할아버지와 그는 알고 있었다.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손님은 여성용 속옷을 입는 취미의 소유자였다. 알려지면 스캔들이 될 만한 고위급 인사였지만 그는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속옷을 숨기기 위해서는 테일러가 알아야 했고, 그들이 입을 다물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가게에 와서 백기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스스로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 서늘함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백기의 앞에서 옷을 벗어 치수를 재고 근육이 붙거나 혹은 과도한 업무 때문에 살이 빠져 1mm 단위로 바뀌는 몸은 드러내 보이면서도 속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강해준은 너무 심했다. 그 덕에 이렇게 젊은 나이에 만만치 않은 가격을 지불하고 이런 가게에 다닐 수 있을 만큼 성공한 것인지도 몰랐다.
마냥 그 점을 부러워하기에는 해준의 얼굴에 따라다니는 피곤함과 수심이 마음에 걸렸다. 저 사람 곁에도 누군가가 있어서 그의 시름을 덜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의 육신을 감쌀 옷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만들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것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이것이 관심인지 아니면 아직은 희미하지만 피어나고 있는 연심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혼자 안절부절 하는 꼴이 웃겼다. 백기는 스스로의 감정을 아직 정의내리지 못했다.
백기는 네이비색 천을 몇 개를 가져와 그의 가슴팍에 대어보며 거울 앞에서 확인시켜 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추천 드리고 싶은 것은 두 번째 것입니다. 피부색이 더 화사해 보이는 효과도 있고요.”
“그쪽이 낫네요. 그렇게 하죠.”
필요한 말 이외에는 내뱉지 않는 성품인지 해준은 긴 말은 하지 않았다. 백기는 주제 넘는 생각을 했다 싶어서 황급히 다른 곳으로 정신을 돌렸다. 요즘 일이 과중한지 아니면 다이어트를 하는지 해준의 허리가 5cm나 줄었기에 잊지 말고 적어둬야 했다. 저 남자에게 관해 뭘 잊을까 싶었지만 백기의 꼼꼼한 성격은 한 치의 실수라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적는 것이 당연했다. 해준은 힐끗 그것을 보더니 궁금했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모르고 있던 백기는 자신의 바로 뒤에 그가 서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고객님?”
“아, 놀랐습니까? 미안합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자세히 적으시네요. 이거 제 트레이너 보다 더 잘 알겠는데요.”
“최대한 완벽하게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 드리고 싶으니까요.”
백기는 머쓱해져서 그저 웃었다. 해준은 백기의 얼굴을 보고는 무슨 생각인지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가까운 거리가 부담스러워진 백기가 슬쩍 고개를 돌려 한 발자국 멀어졌다.
“고객님, 실례하겠습니다.”
“아직도 고객입니까? 만난 지도 오래됐는데.”
의외의 말에 백기는 놀랐다. 그것은 해준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표정으로 드러났을 것이 뻔했다. 안면 근육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려는 찰나, 해준을 만난 후 처음으로 그가 조금이나마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기는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의 대답에 따라 마음이 갈 길을 정하고 싶었다.
“그럼,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이름을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강해준님.”
“님은 빼십시오.”
백기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해준이 앞에 없다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 싶은 정도로 바싹 타들어갔다. 백기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희망을 가지고 입술을 열었다.
“해준씨……?”
“듣기 좋습니다. 그렇게 불러주세요. 백기씨.”
백기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해준의 미소가 짙어졌다. 백기는 멋대로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귀에 울릴 지경이었다. 해준이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은 백기로 인한 것인데도, 그 옷마저 질투가 났다. 마치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짝사랑에 백기는 몸을 던졌다. 일생의 꿈을 향해 걷고 있는 그에게 다른 꿈이 생겼다. 이번 꿈은 어쩌면 백기를 태워서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불꽃이었다.
------------------------------------------
짙님 연성표 보상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쭈굴
백기가 해준 치수 재는게 보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산으로 갔네요......
연성하면 꼭 쓰게 되는게 먹이는거라던가, 옷 입히는 것이라던가 하는건데요. 타인을 구성하는 것을 자기 손으로 해주는 행위를 좋아해서 커플 연성에 자주 적습니다. 보통 먹는 쪽인데 백기는 왠지 요리는 영 아닐거 같아요. (.....)
공미포 2400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