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안녕하십니까?
아직 여름이라기에는 애매한 그런 날이었다. 5월은 매년 높아지는 기온 때문에 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날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오늘은 제법 시원했다. 이런 날이면 다들 엉덩이가 살짝 가벼워져서 자리에 앉아 있는 일이 힘겨워지고는 했다. 외근이라도 있다면 속으로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어지는 날인 것이다.
이럴때 가만히 있을 한석율이 아니었다. 성대리와 같이 얼굴 보고 밥먹기는 당연히 싫었거니와, 특이한 영업3팀의 장그래를 제외하면 다들 같은 부서 사람들 보다는 동기와 점심을 먹는 것을 선호할 것이 분명했다. 석율은 점심시간이 되기 한 시간 전부터 사내 인트라넷으로 찔러대기 시작했다.
“좋았어. 그렇지, 그럼그럼. 이게 다 내 인덕이지.”
모두에게 OK를 얻어낸 석율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는 근처에 새로 생긴 밥집이었다. 간 사람들이 가격대 성능비가 좋다고 칭찬하는데다 모두가 만족할만한 메뉴가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매일 밖에서 먹는 밥이 질리지 않을리 없었다. 결국 돌고 돌아 안착하는 곳은 한식이었다. 집밥같이 나오는 음식점이 제일 무난했으니, 석율과 더불어 나머지 셋에게서도 좋은 호응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점심시간 직전에 15층으로 내려간 석율은 부서들을 돌며 동기들을 하나씩 끌어냈다. 사내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듣는 석율이 답게 유려한 화술로 밉보이지 않게 그래와 영이를 데리고 나온 석율은 마지막으로 철강팀 파티션에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실례합니다! 오늘 장백기씨 좀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동기들끼리 점심이나 먹을까 해서요.”
웃는 얼굴에 침은 못뱉는다고 했다. 쭈볏거리며 슬쩍 눈치를 보는 백기에게 강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웃은 백기가 부서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일행에 합류했다.
1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부르고 기다리자 사람들이 슬슬 여럿 모여들었다. 어쩌다 보니 맨 안쪽까지 밀려 들어갈 만큼 엘리베이터 안이 빡빡해졌다.
“좀 더 일찍 나올걸 그랬나?”
“그러면 업무시간에 나와야 할 겁니다.”
석율의 중얼거림에 그래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대꾸했다. 몸을 돌릴만한 공간이 없었기에 그래의 동그란 뒤통수만 보였지만, 석율은 그 표정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우, 장그래는 열심히기도 하지. 그래도 말이야 사람이 가끔은 요령이 필요해요. 요령이. 안 그래요, 안영이씨?”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쉬이 편을 들어 주지 않을 영이에게 말을 걸어가며 석율은 앞에 있는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그 둘의 뒤에서 석율과 백기의 손가락이 살짝 얽혀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다. 석율이 엄지로 백기의 손바닥을 쓸자 백기가 손톱으로 석율의 손가락 뼈를 자극했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을 외치며 불러내는 것은 석율이 백기에게 보내는 신호이기도 했다. 편한 분위기에서 넷이 밥 먹으면서 즐겁게 점심을 먹고 그래와 영이를 먼저 보내고는 담배 한 대 태우면서 짧은 데이트를 하는 것은 찌든 회사생활에 한 줄기 단비였다. 지난 주말에는 본가에 다녀오느라 같이 있을 틈도 없었기에 짬짬히 보충할 필요가 절실했다. 사내 연애의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을 때 잠시나마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점이었다.
한껏 손장난을 하며 석율의 말장난을 지켜보던 백기는 1층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석율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일견 새침해보이기도 하는 그 행동이 석율의 눈에는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저렇게 철저하게 굴면서도 자기가 내키면 석율을 들었다놨다 하려는데, 그 빤히 보이는 여우짓까지 이뻤으니 말 다했다. 석율은 그래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앞으로 나갔다. 스치듯 본 얼굴은 삐졌는지 살짝 찌푸려져 있었지만 곧 영이가 말을 걸자 이내 펴졌다. 저렇게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니 어찌 귀여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행이 도착한 식당에는 딱 한 테이블이 남아있었다. 재빨리 자리를 잡은 네 명은 각자 메뉴를 골랐다. 기다리는 동안 뻔한 일상 이야기가 오갔다. 좀 있으면 여름이겠다느니, 모 부서의 모 대리는 너무 깐깐해서 상대하기 힘들다느니 하는 흔한 대화들이었다. 석율은 적당히 대꾸하며 백기에게 장난을 걸었다. 구두끝으로 그의 발목을 툭 건드렸다. 기분이 좋으면 백기도 같이 응수해주고는 하는데 조금은 토라진건지 석율의 장난을 무시했다. 개의치 않고 복사뼈를 슥 문지르자 입술을 비죽이더니 종아리 안 쪽을 살짝 건드렸다. 그렇게 몸 따로 말 따로 있다보니 금방 음식이 나왔다.
“오, 나왔다.”
“그거 이리 주세요.”
각자 시킨 음식을 앞에 두고 나니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시장이 반찬이라, 오전 내내 업무에 시달렸으니 배가 고플만도 했다. 수저를 들고 한 술 뜨려고 하는데, 백기가 석율에게 말을 걸었다.
“형, 거기 간장 좀 줘요.”
“응, 그래.”
석율과 백기는 아무 생각 없이 대화를 했는데 그 순간 영이와 그래가 깜짝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간장을 받아든 백기가 그제서야 실수를 깨닫고는 얼어버렸다. 석율은 잽싸게 웃으며 말했다.
“백기씨랑 나랑 많이 친해졌지. 봐봐 이제 형이라고도 하고. 우리 장그래씨도 나한테 형이라고 해봐. 어때? 석율형이라고 하면 좋을 텐데.”
“됐습니다. 식기 전에 얼른 드십시오. 한석율씨.”
변죽좋게 말하는 석율에게 장그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름 세자가 또박또박 악센트를 넣었다. 그래의 시선은 떨쳐냈지만, 영이는 영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백기의 등에 또르르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영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백기를 보더니만 이내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석율도 놀라서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가끔 백기가 자기 내킬 때만 형이라고 부르는데, 회사에서 이런 적은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기는 회사가 아니었지만, 직장 동료 앞에서 실수한 것은 처음이었다. 동료들이 아는 장백기의 성격에 살갑게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도 못할 터였다. 잘 넘겼나 싶어 그래와 영이의 눈치를 보느라 석율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입으로 들어가는 지 알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마자 그래는 김대리에게 온 전화를 받고 뛰어갔다. 사실 그래는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정 안되면 이야기 해도 괜찮다고 해줄 사람이었으니까. 걱정이 되는 쪽은 영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기우였는지, 영이는 둘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럼 전 빨리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올라가시죠. 아직 점심 시간 남았는데.”
“오후 업무 시작하면 전화 올 곳이 있어서요.”
백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이는 고개를 젓더니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여자의 눈치는 무섭다는데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괜찮을까? 백기씨?”
석율이 백기를 바라보자 그는 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도 된다는 그의 몸짓에 석율은 걱정을 접었다. 긴장이 풀리자 한숨이 나왔다.
“어우, 다시는 실수하지 말자.”
“석율씨가 장난쳐서 그렇잖습니까.”
웃음기가 섞인 백기의 목소리에 석율은 과장되게 찡그렸던 표정을 풀었다. 사람들만 없다면 뽀뽀나 해버리고 싶은 입술이었다. 백기가 빤히 입술을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주먹을 쥐고 입술을 가린 채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다고 안 웃은게 되냐? 내가 넘어갈 줄 알아? 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니 석율도 말이 가벼워졌다. 백기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고개를 숙여 석율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손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얘가 이러나 싶어 석율은 조용히 백기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면 어쩔건데, 형?”
그리고는 엄청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석율은 잠깐 벙쪘다가 조금 늦게 정신이 들어 백기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야!”
후다닥 사라지는 뒤에 대고 석율은 결국 혼자 이렇게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게 내가 어쩌냐. 데이트 신청이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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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님 연성표 보상글입니다.
귀여운 둘이 보고 싶었어요. 쓸때마다 느끼지만 석율이 말투는 참 어렵습니다. 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