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은 2:30부터 보시면 됩니다.


조선시대 흡혈귀 AU 주의 

한석율 X 장백기 

칼슘(@X_calcium)님 보상 글





은인




 거문고를 뜯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 소리가 제법 묵직하면서도 처연하여 깊게 맺혔다. 석율은 무디어질 대로 무뎌진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음률이 궁금하여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날은 어둑하니 이미 해는 넘어간지 오래였다.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고 여겼던 것도 잠시, 조금씩 힘을 주니 손끝이 반응했다. 그제야 석율은 왜 이런 곳에 자신이 누워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기진하여 쓰러진 것은 산 속이었다. 어깨가 반은 날아간 부상을 입었으니 회복하려면 피가 필요했다. 아니라면 서서히 말라죽어갈 것이 분명했다. 


 이상하게도 전신을 꿰뚫어야 하는 고통이 없었다. 그저 지독한 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손을 들어 어깨를 만지니 말끔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누군가 제 몸에 손을 댔다고 생각하자 잔뜩 긴장하여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불에 몸이 스치는 소리가 나자 이윽고 거문고 연주가 멈췄다. 


 “힘드실 테니 누워 계십시오.”


 석율은 경계심에 바짝 털을 세운 고양이마냥 튀어오를 뻔 했다. 아무리 다쳤다지만 한 방에 누가 있는 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니 죽었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석율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주워 온 인간이 어떤 이인지 이 사람은 알까. 준식의 수하라면 석율보다 아래일 것이니 제압이 가능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석율은 은인을 해치는 금수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 연주를 하는 이라면 더더욱 해를 입혀서는 안되리라. 나름 풍류를 즐기던 석율이었기에 재주는 귀히 여겨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간곡히 청하여 한 곡조 더 듣고 싶은 마음마저 있었다. 석율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바깥에 기별을 넣었다. 


 “준비한 것을 들이게.”

 “예, 주인님.”


 밖의 인기척은 조용히 움직였다. 멀리있는 사람은 이리 쉽게 알 수 있는데 정작 방 안의 그는 기척이 잘 잡히지 않았다. 피를 많이 잃은 탓인지 감각도 정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도망갈까 싶었던 석율은 일단은 누워 있기로 했다. 어차피 더 도망가봤자 조선팔도에서 준식의 눈을 피하기란 어려웠다. 단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배를 타 건넜던 강화도였다. 여기서도 구명줄을 찾지 못한다면 석율은 밀항하여 중국이나 왜로 넘어가야 하는 처지였다. 그 길로 나서지 않은 것은 준식에게 쉬이 들킬 수였기 때문이었다. 열에 아홉은 바다에 수장될 길을 택할 수는 없었다. 이미 반대쪽 나루터에 준식의 눈이 심어져 있을 것이라는 점에 석율은 목을 걸 의향이 있었다. 


 그는 석율이 가만히 있자 몸소 일어나더니 문을 열어 쟁반을 받아들어 들어왔다. 훅 끼치는 냄새는 익히 아는 것이었다. 신선한 사람의 혈액. 그것도 석율이 선호하는 젊은 처녀의 피였다. 피의 소유자가 제법 미색이 고울것이라 짐작되는 깨끗하고 향기로운 향이 났다. 석율은 본능적으로 밀려나오는 송곳니를 손으로 급히 가리며 애써 뒤로 물러났다. 위장 깊은 곳에서 쥐어짜듯 허기가 밀려왔다. 


 “대,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피를 많이 쏟았습니다. 회복하려면 필요할텐데요. 직접 사람을 데려오는 편이 좋겠지만, 지금 당신이라면 조절하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테니 이것으로 임시방편이라도 하십시오.”


 들켰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조선에 흡혈귀라는 존재는 흔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했다. 대부분 준식이 늘려놓은 자식들이지만 가끔 그의 혈통이 아닌 자들도 존재했다. 석율은 준식의 보좌였던 만큼 많은 흡혈귀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석율은 눈 앞에 있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사발을 받아 마시고 싶은 마음과 목숨을 부지하려는 경계심이 석율의 몸을 가지고 밀고 당겼다. 혼란스러워하는 석율의 상태를 짐작했는지 그는 좀 더 가까이 석율에게 다가왔다. 훅 끼치는 생명의 냄새에 석율의 이성이 잠식되어 갔다. 고개를 젓는 석율의 입술을 그가 손끝에 피를 묻혀 적셨다. 혀가 밀려나온 것은 본능이었다. 핥은 피에서는 피릿한 철냄새가 났다. 향기로웠던 것은 피가 아니라 손의 주인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손목을 쥔 채 허겁지겁 달려드는 석율의 턱을 잡고 그릇을 가져다 댔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피는 밖으로 흘러 석율의 턱을 적셨다.


 뜨끈한 피가 뱃속까지 닿아 조금이나마 기력을 보충하자 아직도 어둡기 그지 없다는 사실을 석율은 다시 인지했다.   정신이 번쩍 든 석율은 그의 손을 놓았다. 텅 비어버린 사발을 놓는 손길마지 정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려면 이 공간에 아주 익숙하거나 아예 맹인이어야 할 터였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전제하의 조건이었다. 인외의 괴물이라면 빛 같은 것은 사소한 제약에 불과했다. 오히려 흡혈귀라면 빛이 달가울리 없었다. 


 석율은 제가 구명줄에 손이 닿았음을 깨달았다. 이것을 틀어쥐지 않으면 죽게되리라는 것도 명확했다. 이 사실만큼  맑게 돌아온 시야에 희디흰 도포를 입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석율은 깊히 몸을 숙여 절했다. 


 “진마 망야(忘夜)께 인사드립니다.”


 밤을 잊은 자. 모든 것을 놓고 심산유곡으로 숨어든 흡혈귀들의 왕. 장백기가 무심한 눈으로 석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율의 머리 위로 안타까운 한숨이 내려앉았다. 백기의 숨 한 조각 까지 놓치지 않으리라. 진마라면 석율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넓은 나무 밑에 숨어 비를 피하려던 석율이 진짜 제 주인을 만났다는 것은 훗날에야 알게 될 일이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