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다.
석율X백기
장백기를 아는 덕후들은 말한다. 그의 일코는 완벽하다고. 엘리트 코스를 짱짱하게 밟고 있는데다, 누가 봐도 오타쿠의 낌새는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SNS는 덕계와 일코계가 당연히 따로 존재했고, 하다못해 얼굴책이나 인별그램은 아예 덕질 계정을 만들지도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자주 청소하는 트위터 계정은 소비러란 무엇인지 고찰하기 위한 자료로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랬던 그가 덕밍아웃을 당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 백기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사소한 실수가 겹치면 큰일이 벌어지는 것이 세상사다. 술에 취해 기절해 있을 때, 트위터 알람을 해지 하는 것을 까먹은 탓이었다. 게다가 같이 마신 상대가 그 한석율이고서야 들키지 않는 일은 만무하지 않은가.
백기가 일코의 전문가라면 한석율은 진정 대가라 불릴 만 했다. 머리털 나고 덕후가 아닌 적 없었던 그가, 야밤에 울리는 트위터 알람 소리를 아무리 시끄러운 술집이라도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처음엔 순수하게 그를 걱정해서 핸드폰의 알람을 끌 생각이었다. 백기가 반은 술에, 반은 잠에 취했기에 조금이라도 재우고 보내려 했다. 정말이지 남의 사생활을 엿볼 의도는 솔직히 말한다면 아주 약간만 있었지, 대놓고 그렇게 훔쳐볼 생각은 없었다. 누가 그의 비도덕성을 따진다면 석율은 자신 있게 ‘반한 상대에 관한 정보 수집은 기본이지 말입니다.’라고 대꾸할 용의가 충분했다.
Twitter 1분 전
@dbfqorLove님의 멘션: 토끼님 이번에 XX라이브 극장판 나온 대요! 알티했어요! 이것 좀 봐요!!!!!!!!! ㅠㅠㅠㅠ ㅅㅂ... 내가 일본에 가고 만다!!!!!
타임라인이 미친 듯 갱신되는 멘션들은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다. 광란의 불금 밤은 지인이 주요소식을 전하기 위해 트위터 아이디를 태그하기에 적절한 시간이었다. 좋은 지인을 둔 것이 분명했다. 석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핸드폰에 지인의 아이디를 저장했다. 핸드폰 잠금을 푸는 시도는 해볼 법 했지만 미리알림이 꺼져있다면 백기가 깨어났을 때 멘붕 할 것이 분명했기에, 완전범죄를 꿈꾸며 얌전히 내려놓았다.
***
“XX라이브라니 백기씨 취향 참 좋네~.”
자고 있는 백기를 어르고 달래서 집에 보내고 귀가한 석율은 컴퓨터를 켰다. 입덕할까 말까 하면서 애니 오프닝만 장르였다. 웬만큼 유명하다 싶으면 훑어보는 것은 당연한 잡덕의 정도를 걷는 석율이었기에 어느 장르인지 간보는 시간은 생략할 수 있었다. 게임도 꽤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업무 강도에 게임까지 시간 쪼개가며 플레이하는 것은 힘들었다. 석율은 이번 주말은 애니메이션 삼매경으로 보내기로 작정하고 빠른 속도로 검색을 시작했다.
구석에는 애니메이션, 옆에는 트위터 어플리케이션. 석율은 익숙한 화면 구도에 만족했다. 적당히 새 이메일 주소를 만들고 트위터 계정을 팠다. 장르 분위기도 파악할 겸 구독계라고 애절한 멘트를 달고, XX라이브를 파는 연성러를 찾아 헤맸다. 메이저의 파워에 잠시 떠내려갈 뻔 한 석율은 머리를 굴렸다. 오래된 실친이자, 여친은 D를 하나 뺀 2D에 있다며 독신주의를 2n년 째 외치는 녀석이 그 장르를 파고 있었다. 냉큼 팔로하고 갤러리를 뒤지자 연성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익숙한 아이디가 보였다.
“이야, 아까 그 분! 반갑네. 팔로 하고~. 뒤지면...... 짜잔! 이게 백기씨 덕계구만.”
트윗 청소를 아무리 돌려도 프로필은 자주 바꾸지 않기 마련이었다. 2D 아이돌의 상큼한 미소가 프로필 사진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최애 이름, 장르명, 질문 주소 등등 정보가 가득한 프로필을 훑던 석율은 깐깐한 백기의 성격답게 프텍계라는 것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팔로는 해보겠지만 영 촉이 안 좋았다. 아직 석율의 계정은 뽀얀 알이 반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정주행도 못했고 연성도 시작하지 않은 장르에서 아무나 프로필 사진에 걸 수는 없었다. 석율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애니메이션을 전체 화면으로 돌렸다.
***
“아아악!”
이제 몸이 20대 초반의 팔팔하던 시절처럼 예전 같지 않은데 밤을 새버렸다. 그 새벽에 호기심에 가득 차 보는 것이 아니었다. 자고 깨서 감상할 걸!!! 늘 그렇듯 행동은 빠르고 후회는 늦었다. 날이 밝아오니 푸르슴한 빛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그동안 석율은 오프닝과 엔딩을 건너뛰고 1기를 거의 다 보는 신공을 발휘했다. 간만의 십대 소녀들은 아이돌이 무엇인지 보여줬고, 이것은 석율의 모에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 어쩐지 3D 아이돌이 요즘 땡기지 않는다 싶었다. 여기에 꽂히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석율은 뻐근한 몸을 이끌고 침대 위를 뒹굴면서 핸드폰으로 본계에 들어가 그 친구에게 멘션 폭탄을 날렸다. 입덕을 축하하는 멘션을 기대했지만 그의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BBB @bibibic_xxx 1분 전
@lollollol9984 야, 나 XX라이브 입덕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우 @lollollol9984 1분 전
@bibibic_xxx 내가 파자고 할 때는 신경도 안쓰더니!!! 이래서 취향 아님 드립은 치는게 아님 ^0^9m
BBB @bibibic_xxx 38s
@lollollol9984 이 자식이. 뉴비를 아껴주진 못할망정!!!!!!
로우 @lollollol9984 now
@bibibic_xxx 죄송 ㅋ 최애 누구냐? 연성해줘!!!!
아놔. 오래된 지인에게 뭘 바랐나 싶었다. 석율은 그의 말은 씹어버리고 아까 새로 만든 계정에 들어갔다. 백기가 수락 했는지 확인하고 수마에 몸을 맡길 셈이었다. 그리고 들어가서야 알게 됐다. 백기에게 한 팔로 요청은 거절당했다. 블언블까지 했는지 석율의 팔로잉 목록에서도 삭제되어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속이 쓰렸다.
아니다, 기회는 곧 찾아올 것이다. 두고 보라지. 2기까지 달리면 연성해서 본계로 입덕을 외치고 다닐 것이다. 그때는 ‘토끼님’하고 친분을 쌓을 수 있기를 바랐다. 석율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