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
해준 X 백기 / 야구선수 AU
이런 순간이 있다. 백기는 손끝에 걸리는 경식구의 실밥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엄청난 데시벨을 자랑하던 응원 소리가 의식에서 사라지면 시작된다. 잘 다져진 그라운드의 흙냄새, 뺨을 지나가는 바람,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하나씩 멀어진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사인을 보내는 포수의 손과 명확하게 그려지는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손에 감기는 공의 감촉이 늘 그렇듯 익숙했고, 또 생경했다. 눈도 나쁘고 평소에는 절대 보이지 않을 것들이 인식된다. 포수 보호장비 너머 해준의 표정까지도 알 것 같았다. 최고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순간이 한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오늘 투수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해준은 기억나지 않을 무렵부터 야구공을 가지고 놀았고, 기억날 무렵부터는 홈에서 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야구를 사랑하게 되자 에이스의 공은 해준의 몫이 되었다. 많은 투수가 마운드에 섰고 또 그곳을 떠났다. 에이스가 되어 피어나 빛나는 투수는 한줌에 불과했다. 이제 해준은 누가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지 짐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수없는 경쟁을 뚫고 팀의 주전포수를 차지하는 것은 그만한 능력과 노력을 요구했다.
팀의 기대를 어깨에 얹고 저기 서있는 투수는 장백기였다. 투수들 중에는 제일 막내였고, 이제야 팀에서 자리를 잡은 선수였다. 그는 폼을 교정하면서 지난 시즌은 잠잠히 보내야 했었다. 작년에 나름 그 해의 루키로 촉망받았지만, 해준의 눈에는 아직 한참 먼 햇병아리였다. 뽀송뽀송해서는 이제 엉덩이에 알껍질 달고 다니는 주제에 얼마나 삐약대는지, 써먹으려니 골치 아팠다. 많은 일들과 그에 더한 풍파를 거치고 나서야 팀에 도움이 되는 투수가 됐다. 그렇게 되기까지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자면 소설책 한권은 나올 분량이었다.
자기를 왜 그렇게 싫어하냐며 코웃음도 안나오는 대거리를 하던 꼬맹이는 이젠 우여곡절 끝에 해준에게 예쁨받는 파트너였다. 해준이 스스로의 몸을 잘 관리하고, 둘이 다른 팀으로 갈라지지 않는다면 그가 에이스가 되어 몇년간은 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현재는 한 세번 째 카드 쯤으로 감독이 고려할 만한 투수로 급부상했다. 이제 갓 걸음마 하는 꼬맹이에서 차세대 주자로 발돋움 한 것이니 대단했다. 정신차린 백기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백기는 눈에 띄었다. 그 재능이 묻히지 않게 끌어주는 것은 포수가 할 일이었다. 해준은 자타공인 유능한 포수였다. 해준의 몸값이 이 정도까지 오른 것은 그가 홈을 지키고 있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덕분이었다. 절일때 소금 팍팍 뿌려가며 절이더라도 쓸때는 확실히 투수의 힘을 끌어냈다. 지금은 백기의 몸짓 하나만으로도 무슨 생각인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신나서 참지 못하고 입꼬리가 살살 귀에 걸릴 것 같은 상태였다. 이런 날은 제구도 좋다. 시합 전에 천천히 몸을 풀면서 나눴던 대화와, 그의 유연했던 몸짓이 떠올랐다.
해준은 신호를 보내기 전 그라운드를 체크했다. 2루에 주자가 있었다. 야수들은 좋은 자리에서 바로 반응 할 수 있게 준비를 끝냈다. 우리의 에이스는 지금 최고였다. 해준은 백기를 믿고 요구했다.
가장 좋아하는 공을 요구하는 해준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깨 근육과 팔꿈치, 손목을 거친 스핀이 힘있었다. 지금이라면 그가 원하는 어느 곳에도 공을 넣을 수 있었다.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존에 꽉 차게 들어간 공은 타자가 손도 대지 못하고 귀에 즐거운 소리를 내며 미트에 꽂혔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판정이 경쾌했다. 방금 전에 타자로 나가서는 깐깐하다며 온갖 악평을 퍼부었던 것은 까맣게 잊었다. 공에 배트를 대보지도 못하고 삼진을 먹은 타자가 고개를 내저으며 타석을 나섰다. 백기는 보는 눈이 없었다면 마운드에서 펄쩍 뛰고 싶을만큼 기뻤다.
“타자 아웃!”
이번 타자로 공수 교대였다. 백기는 자기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해준에게 달려갔다. 말 없이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신뢰가 담뿍 묻어났다. 포수 마스크 너머로 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시작입니다, 장백기씨.”
“네?”
“오늘 당신을 승리 투수로 만들어 줄게요.”
그러니까 나를 믿고 따라와요. 해준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백기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삼진아웃만큼 짜릿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반응하는 심장박동은 타자 승부에 이긴 흥분에 섞였다. 둘을 구분하지 못한 백기는 좋은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벤치로 달려갔다.
그 날 경기는 당연하게도 승리했다. 그리고 포수가 백기의 마음에 스트라이크를 하나 던졌다.